한 점의 물방울이 어떻게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을까.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김창열. 그의 작업이 한 줄기 물처럼 고요하게, 그러나 깊게 흐르는 예술적 여정을 되돌아보는 대규모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막을 올렸다.
작고 이후 처음 열리는 이번 회고전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김창열이라는 작가의 내면과 집념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기획이다.
전시는 총 4개의 장과 별도의 아카이브 공간으로 구성되어, 김창열이 물방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시간 순으로 따라간다.
전시의 첫 장은 ‘상흔’. 어린 시절 전쟁과 이산을 겪은 김창열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대적 아픔을 그림으로 응축해왔다. 1950년대 후반, 그는 ‘현대미술가협회’를 창립하고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며 한국 추상미술의 선봉에 섰고, 파리와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해외 무대에도 발을 내딛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시기를 보여주는 드문 초창기 작품들과 함께, 처음 공개되는 1955년작 <해바라기>도 만나볼 수 있다.
두 번째 장 ‘현상’은 김창열이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예술적 정체성을 모색했던 전환기를 다룬다. 뉴욕에서의 낯설고 고립된 경험은 그로 하여금 기존 앵포르멜 화풍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었고, 보다 정제된 추상 작업과 조형 실험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얼핏 낯설지만, 훗날 물방울로 응축될 조형 언어의 전조다. 특히 1971년에 제작된,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물방울 회화 두 점이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이어지는 세 번째 장 ‘물방울’은 김창열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킨 시기다. 투명하고 극사실적인 물방울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존재의 본질과 무게를 끌어안는다. 그는 파리 외곽의 마구간 작업실에서 물방울에 천착하며, 에어스프레이 기법, 얼룩, 콜라주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화면과의 관계를 실험했다. 1973년 첫 파리 개인전 이후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 시기의 대표작들이 대거 전시된다.
마지막 장 ‘회귀’는 물방울과 문자가 만나는 지점이다. 천자문과 신문지 위의 글자를 화면에 함께 올리며, 작가는 이미지와 언어, 존재와 기억 사이의 긴장과 조화를 탐색했다. 이 작업은 단순한 시도 이상의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으며, 물방울 회화의 형식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중 처음 공개되는 가로 7.8미터 규모의 대작 <회귀 SNM93001>(1991)도 선보인다.
전시의 말미에는 별도의 아카이브 공간 ‘무슈 구뜨(Monsieur Gouttes, 물방울 씨)’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선 김창열이 영향을 받은 시인 아폴리네르의 상형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 국내외 최초로 공개된다. 그의 물방울이 단순한 회화적 형상이 아니라, 시와 존재, 시간의 은유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시는 12월 2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물을 응시하듯, 천천히, 깊게 들여다보면 좋을 전시다.